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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전차에서만 볼 수 있던 치머리트 코팅

생나기헌 2022. 4. 8. 08:11

[밀리터리 과학상식] 자기흡착지뢰에 대한 고민의 산물로 탄생

전차는 생각보다 비싼 장비다. 전차라는 장비가 생긴 지 100년이 넘었고, 그동안 수많은 전차가 피고 져 갔으니 그 가격을 일률적으로 매기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K-1 전차만 해도 가격이 무려 30억 원, 더욱 발전된 K-2 전차는 80억 원에 달한다. ( 한국군 납품가 기준. 증가장갑과 능동 방어 장치 등 첨단 옵션을 추가하면 대당 100억~130억 원 정도 )

 

그리고 이 전차가 다수의 전차병을 태우고 최일선에서 적의 포화를 얻어맞아 가면서 전투를 벌인다. 이 전차병은 군사학적 관점에서 볼 때 분명 전차보다도 더욱 귀중한 자산이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윤리적 당위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다. 갓난아이를 키워서 군대에 입대시키는 데까지 만도 무려 20년이나 양육을 시켜야 한다.

 

또한 전차병은 육군에서도 골라 뽑은 인재다. 고가의 정밀 장비인 전차를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다년간의 실무 및 실전 경험까지 더해진 전차병은 전사 및 부상 시 생각만큼 쉽게 대체할 수 없다. 그리고 전차병이 전사 및 부상을 당하면 종전 후 산업 현장에서 일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없게 된다.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차 설계자들은 전차병의 생존성을 높이기 위해 나름대로 머리를 쓴다. 제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장갑판을 최대한 두껍고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군 수뇌부가 중시하는 공학적 및 경영학적 입장에서 최상책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전차는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엔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만 무게를 늘릴 수 있다. 그리고 예산은 오르지 않았는데 장갑이 두터워져 전차의 단가만 올라가면 그만큼 장비 대수와 전투력은 줄어든다.

 

따라서 모든 전차를 보면 공학적 및 경영학적으로 타당한 방식으로 방어력과 생존성을 높이기 위해 애쓴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대전차 무기 자기흡착지뢰는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자기흡착지뢰란, 간단히 말해 자석을 단 대전차 유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전차 유탄은 먼로-노이만 효과를 응용하여 전차의 장갑을 뚫는 탄이다.

 

먼로-노이만 효과는 유탄 내에 작약을 충진할 때에 최선단부분을 원추형으로 비운다. 그러면 이 유탄이 표적을 타격, 작약이 폭발할 때 폭발 에너지, 즉 고온 고압의 열과 기체가 유탄 전방의 일정한 초점 거리로 집중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물 대포로 장애물에 구멍을 뚫는 것과도 비슷하다.

 

때문에 대전차 유탄은 탄의 속도가 0인 상태에서도 명중, 격발만 하면 전차 격파가 가능했다. 이는 기존의 대전차 철갑탄에 비교했을 때 엄청난 장점이었다. 대전차 철갑탄은 운동에너지에 의존해 표적의 장갑을 관통한다. 그리고 높은 운동에너지를 내려면 탄의 질량과 속도가 다 같이 높아야 한다. 따라서 무거운 탄을 고속으로 날려보낼 수 있는 대전차포로 쏴야 장갑 관통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전차 유탄은 빠르게 날려보낼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에 사람이 들고 가서 전차에 붙인 다음 격발시키기만 해도 되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전차는 철로 만들어진다. 철은 자성이 있다. 그러면 대전차 유탄에 자석을 붙여, 적 전차에 확실히 달라붙게 하면 기존의 화염병이나 집속수류탄보다도 훨씬 효율적인 보병용 대전차 무기가 될 것이다. 자기흡착지뢰는 바로 이러한 발상에서 개발된 것이다.

 

특히 독일군이 1942년부터 실전 배치한 자기흡착지뢰 하프트호흘라둥(Hafthohlladung)은 장갑 관통 능력이 140mm에 달해, 당시 현존하던 거의 모든 전차를 격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독일은 연합군이 유사한 무기를 개발하거나, 하프트호흘라둥을 노획해 독일군 전차에 사용하는 사태를 두려워했다. 그렇다고 독일군 전차의 장갑 두께를 모두 140mm 이상으로 늘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전차의 자성을 막아라!

 

그렇다면 전차 차체에서 나오는 자성을 없애면 자기흡착지뢰가 아예 붙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발상에서 발명된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 전차에서만 볼 수 있던 특이한 코팅인 ‘치머리트(Zimmerit) 코팅’이었다.

독일 전차에 적용된 치머리트 코팅 ⒸWikipedia

1943년 11월 생산 차량부터 적용되기 시작한 치머리트 코팅은 개발사인 베를린의 C.W. 치머 AG 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 성분은 염화바륨 40%, 폴리비닐 아세테이트 25%, 황토 염료 15%, 황화아연 10%, 톱밥 10%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방청도료 처리까지 된 장갑판 위에  코팅을 하고, 그 위에 차량 위장도색을 했다. 이 코팅은 적이 자기흡착지뢰를 붙이기 수월하다고 판단되는 차체 정면과 후면, 측면에만 실시되었고, 차체 상면과 하면에는 실시되지 않았다.

 

이 코팅을 입히는 방식이 또 걸작이었는데, 일단 5mm 두께로 초벌 코팅을 입히고 나서 24시간 건조한 후 표면에 모종삽 등의 공구로 바둑판무늬를 새긴다. 그다음 재벌 코팅을 또 입히고 나서 쇠빗 등의 공구로 특유의 복잡한 표면 무늬를 새긴다.

 

이렇게 무늬를 새기는 이유는 많았다. 재벌 코팅이 초벌 코팅에 잘 들러붙게 하고, 포탄에 피격 등 큰 충격을 받았을 때도 코팅이 일부만 떨어져 나가게 하며, 무엇보다도 자기흡착지뢰가 잘 달라붙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무늬까지 새기고 나면 블로우토치 등으로 구워서 건조한다. 블로우토치가 없어도 자연 건조가 되기는 하지만, 자연 건조에는 무려 8일이 걸린다.

 

이러한 치머리트 코팅은 전차의 자성을 없애는 것 이외에도, 전차 표면을 두텁게 감싸 대전차 유탄이 효과적인 초점 거리를 얻지 못하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대전차 유탄은 먼로-노이만 효과를 통해 작약의 폭발력을 하나의 초점으로 모아 높은 관통력을 얻는 방식인데, 장갑판 위에 두텁게 쌓인 이물질(치머리트 코팅) 때문에 장갑과의 정확한 초점 거리가 확보가 안 되면 관통력도 그만큼 반감되는 것이다. 전차의 표면을 무광으로 만들어 위장 효과를 높이는 부수 효과도 있었다.

 

칼이 사라지니 방패도 소용없어

 

하지만 치머리트 코팅은 1944년 9월을 기해 폐지된다. 일단 연합군은 생각보다 자기흡착지뢰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독일군은 치머리트 코팅을 생략하고, 거기 들어갈 비용과 시간을 다른 장비 생산에 돌리는 것이 더욱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치머리트 코팅 때문에 전차의 제작 시간이 며칠은 늘어났다. 게다가 코팅 재료의 무게도 차종마다 다르지만 100~200kg은 되었다. 75mm 전차 포탄 약 10~20발의 무게였다.

 

결국 ‘있지도 않은 칼을 막는 방패’ 신세가 되고 만 치머리트 코팅이었지만, 바다 건너 태평양 전선을 보면 이게 완전히 쓸모없는 헛짓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일본군 역시 ’99식 파갑폭뢰’라는 자기흡착지뢰를 보유, 대량으로 운용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독일 것과는 달리 대전차 유탄이 아니라 일반 유탄을 쓰는 바람에 파괴력은 낮았다(장갑 관통력 20mm). 그러나 2발을 집속하면 관통력을 30mm까지 늘릴 수 있고, 이걸로 미군 전차 상면이나 하면, 특히 해치를 노리면 격파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일본이 옥쇄 전법을 구사한 전쟁 말기 다수의 일본군 보병들이 이걸 들고 자살 공격을 해왔다. 때문에 미군은 실로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일본군 보병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려고 마치 거북선처럼 전차 지붕에 많은 스파이크를 얹기도 했다. 파갑폭뢰의 자석이 붙지 않게 전차 차체에 알루미늄판이나 철망, 나무판을 달거나 심지어는 시멘트 칠까지 하기도 했다. 전쟁 후 영국군이 실시한 테스트에서 치머리트 코팅의 방어력이 꽤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에 치머리트 코팅 기술이 있었다면 그런 촌극은 빚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어느 나라도 치머리트 코팅 또는 그 비슷한 제품을 만들지 않았다. 이미 로켓 발사식 대전차 유탄이 보병용 대전차 무기의 주류가 된 마당에, 자기흡착지뢰는 구시대의 것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판처파우스트’, ‘판처슈렉’ 등의 로켓 발사식 대전차 유탄의 보급에 힘쓴 나라도 다름 아닌 독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