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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 흐르는 플라스틱? 두 ‘앨런’이 만든 혁명

생나기헌 2022. 4. 8. 08:09

전기가 흐르는 플라스틱? 두 ‘앨런’이 만든 혁명

앨런 히거와 앨런 맥디아미드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전도성 고분자의 발견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은 앨런 히거와 앨런 맥디아미드. 서로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 동명의 이름을 가진 두 과학자는 동시에 같은 것을 연구하고 함께 노벨상을 받았다. 놀라움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두 앨런은 서로 우정을 나누며 전기가 통하는 플라스틱을 발명함으로써 인류에게 ‘플라스틱 혁명’을 가져다주었다.

 

두 앨런이 발견한 플라스틱의 혁명

 

플라스틱은 전기가 통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플러그나 전선 피복을 플라스틱으로 만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절연체 성질을 깬 플라스틱을 발견한 ‘두 앨런’이 있다. 앨런 그레이엄 맥디아미드(Alan Graham MacDiarmid, 1927~2007)와 앨런 히거(Alan Jay Heeger, 1936~)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기존 플라스틱의 성질이라고 생각했던 상식을 깨고 전기가 통하는 플라스틱을 개발했다.

앨런 히거는 맥디아미드와 함께 공동 협력하며 물리학과 화학을 결합시켰다. ⓒ 김은영/ ScienceTimes

이들의 연구는 인류 역사상 놀라운 기술의 진보를 가져왔다. 이들이 발견한 전도성 고분자는 스마트폰이나 TV 디스플레이 등 발광다이오드(LED)가 필요한 디스플레이 분야, 태양광 전지 분야 등 다양한 첨단 기술에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를 처음 구상한 이는 앨런 히거 당시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수였다. 그는 앨런 맥디아미드 교수를 찾아 동료 화학 교수인 모트 라베스 교수가 고도로 전도성이 높은 자료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고 알렸다. 이를 계기로 히거와 맥디아미드 교수는 함께 전도성 중합체에 대해 연구하게 된다.

전도성 플라스틱은 인공위성이나 항공 산업 등에 금속을 대체할 수 있어 앞으로 더욱 무한한 가능성이 기대되고 있다. ⓒ 게티이미지뱅크

그러던 중 1975년 맥디아미드 교수가 일본에 객원교수로 갔다가 훗날 함께 노벨상을 받게된 시라카와 히데키 일본 쓰쿠바 대학 교수를 통해 연구의 실마리가 되는 부분을 찾게 된다.

 

맥디아미드 교수는 미국으로 돌아와 히거 교수에게 연구 과정을 알리고 시라카와 히데키 교수를 펜실베이니아 대학으로 초빙해 함께 전도성 플라스틱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한다. 그리고 연구를 거듭한 결과 플라스틱에 불순물을 화학적으로 첨가해 분자의 특성을 바꾸게 되면 플라스틱이 전도체로 변한다는 놀라운 연구 결과를 밝혀냈다.

 

우정과 과학이 함께 만들어낸 놀라운 성과

 

이들의 만남은 과학 역사상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 바로 화학과 물리학의 조화가 이루어진 연구였기 때문이다.

앨런 맥디아미드는 전도성 플라스틱(고분자)의 발견에 대한 공로로 앨런 히거, 시라카와 히데키와 함께 2000년 노벨 화학상의 주인공이 됐다.

이들은 처음에 서로 과학적인 언어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서로의 전공 분야가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기 언어 문제를 극복하자 진정한 협력이 시작됐다. 히거는 맥디아미드와의 만남을 ‘화학과 물리학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긴 범위’였다며 “나는 물리학자였지만 맥디아미드 교수를 만나면서 화학자로 변모했다”라고 회고했다.

 

히거는 당시 모트 교수가 상상했던 금속-절연체에 대해 크게 매료되어 있었다. 맥디아미드도 마찬가지였다. 두 과학자는 서로 배우기 위해 몰두했다. 모르는 것을 서로 배우기 위해 주중은 물론 주말 시간까지 할애했다. 히거는 “우리는 주중에 서로 만나 연구를 하고도 보통 토요일 아침에도 아무 의제도 없이 만났다”며 “서로 단지 배우기 위해서”였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들의 연구에 대한 무모하고 끈질긴 열정과 집념은 앞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첨단 과학기술 분야의 초석이 됐다. 결과만 두고 봤을 때 이들의 연구는 오랜 기간 걸친 장기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그 결실을 나눠 가졌다.

 

전도성 플라스틱은 지금도 더 많은 가능성을 향해 연구 개발 중이다. 현재 미국 UC 산타바바라 대학교수로 재직 중인 히거 교수는 태양광 전지에 대한 전도성 플라스틱의 가능성에 대해 도전하고 있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책장을 넘기듯 마음대로 휘어지는 플렉서블 디스플레이나 하이브리드 유연 투명 전극, 인공위성이나 항공산업까지 물리학과 화학의 경계에 있는 새로운 연구 분야들이 두 앨런을 통해 앞으로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