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고발합니다

전쟁터에서도 구급차는 공격을 안하건만...

생나기헌 2015. 11. 21. 15:45

전쟁터에서도 구급차는 공격을 안하건만... 

 

 

 

 

다음은 고 씨의 대자보 전문. 

의협·대전협·의대협을 비롯한 모든 의사 선배님들께 묻습니다. 

지난 11월 14일 저는 서울 광화문 만민공동회 집회에서 끔찍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시위를 하던 한 청년이 넘어져 팔이 부러져서 고통을 호소했고 주변 사람의 신고로 도착한 구급차는 들것에 실린 환자를 싣기 위해 뒷문을 열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경찰은 호송되고 있는 환자와 열려있는 구급차 뒷문 안을 향해 최루액이 담긴 강한 수압의 물대포를 직사로 쏘았습니다. 물대포에는 카메라가 달려있었고 직사는 일 분여가량 지속되었습니다. 경찰이 구급차를 조준하여 사격한 것입니다. 해당 환자는 현재 뼈뿐만이 아니라 인대까지 끊어져 수술 중입니다. 사실 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집회현장은 항상 의료의 사각지대였습니다. 하지만 경찰이 현장에서의 구호활동을 방해한 것 뿐만 아니라 이를 공격한 것은 유례없는 일입니다. 

저는 이글에서 시위대의 위법 여부도 경찰의 과잉진압 여부도 논하지 않겠습니다. 이는 논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의료진은 치료를 요하는 환자가 그 어떤 사람이라고 최선을 다해 의술을 펼쳐야 하며 이는 히포크라테스 선서 전문에도 명시되어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 어떤 종교를 가졌는지, 혹은 그가 악인인지 선한 사람인지, 범죄자인지 아닌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 세계 모든 의료인들의 의무이고 원칙이며 가장 기본적인 도덕률입니다. 그렇기에 수많은 의료인들께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전쟁의 포화 속으로 달려갔고, 그렇기 사람을 살리며 죽어갔습니다. 우리 의료인은 그렇게 4.19에서도 5월의 광주에서도, 아니, 죽음이 이루어지는 그 모든 소외된 시간과 장소에서 존재했습니다. 지금도 국경없는 의사회를 비롯한 수많은 선생님들께서 그 길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죽음과 압제 속으로 기꺼이 걸어온 발자취가 바로 의술의 역사고 우리의 역사입니다.

존경하는 의과대학 교수님! 성적이 나빠 유급까지 당한 불민한 제자이지만 저는 교수님께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의업은 누구에게나 행해져야 한다고. 또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이는 의료인들뿐만 아니라 전 인류가 공감하고 있기에 존경스러운 수많은 의료인들께서는 전 지구적 보호와 지원 아래서 구호/지원 활동을 해나갈 수 있던 것입니다. 이 합의를 깨고 들것에 실린 환자와 이를 호송하고 치료하는 의료인을 공격하는 것은 전쟁터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입니다. 하물며 이런 야만을 정부가 자국의 시민들을 향해 저지를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 입니다. 장소가 어디고 상황이 어떠한지와는 관계없이 무방비의 환자와 의료인을 공격하는 것은 인류가 이뤄온 합의와 생명의 무게를 짓밟는 죄악입니다. 이를 좌시한다면 앞으로 어떤 의사가 마음 놓고 환자를 진료할 수 있으며 어떤 의료인이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양심과 대의에 몸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이는 지금까지 수많은 의료인이 지켜온 가치가 내던져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쌓아올린 뜻이 무너지는 이 순간에 우리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의사, 의대생을 대변하겠다고 자처하며 회비를 걷어가는 의협·대전협·의대협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의료의 윤리와 양심과 긍지와 역사가 짓밟힌 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이 되어가는 동안 의사단체들은 어떠한 논평이나 보도자료 하나 내지 않은 채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의사의 참모습입니까? 저희도 커가다보면 환자와 의사를 향한 폭력에 침묵하는 의사로 자라나게 됩니까? 환자와 의료인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야할 국가가 맨 앞에서 이를 자행할 때 침묵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어떻게 지켜나가야 합니까. 교수님들! 선배님들! 동기님들! 의료윤리를 짓밟는 이 사건에 분노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막아내는 것이 우리들이 배워왔고 또 행해야 할 마땅한 길 아닙니까.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무디게 만든 것 입니까. 저는 부끄럽습니다. 자국민을 들것으로 후송하는 사람들과 구급차를 조준 사격하는 집단에게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읽고 이를 행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의협은 부끄러움을 아십시오. 의료 수가를 논하고 의료규제 기요틴을 말할 땐 국민들의 관심과 힘을 호소하던 우리가 정작 환자와 의료진에게 행해진 폭력에 입을 닫는다면 우리는 무슨 낯으로 국민들과 환자를 마주보겠습니까. 선배의사님들이 입을 닫고 있는 걸 보면서 우리는 의사가 되어 무슨 면목으로 환자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전국의 모든 선배 의사선생님들, 의대생 학우분들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부끄러워합시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의료의 존엄을 위해 행동합시다. 이런 일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정부/경찰당국/의협/의대협에 목소리를 높여 주십시오. 아울러 집회현장 내에서 경찰과 시위대를 포함한 모두가 신속하고 알맞은 응급의료를 받을 수 있는 지원체계 마련을 요구하는 데에도 함께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더 이상 부끄럽지 않도록 지난 14일 한순간에 짓밟힌 생명의 가치를 드높여 주십시오.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게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 히포크라테스 선서 전문 중 

다가오는 투쟁의 역사 속에서.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의학과 11학번 고은산. 

 

 

 

 

출처